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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씨의 "나의 목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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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http://venus4212.com.ne.kr 작성일2006-12-02 22:08 조회6,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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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9030806.219.0.jpg


내가 지금 짚고 다니는 목발은 정확히 22년전인 1978년 9월 뉴욕시의
어느 의학 기구 용품점에서 산 것이다.
내가 유학차 올버니에 있는 뉴옥 주립 대학교에 간지 꼭 일주일 후였다.
일부러 미제 목발을 사려고 미국 갈 때까지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급하게 목발을 사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유학 생활의 첫 학기가 시작되고 첫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저녁 7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는 "여성과 문학"이라는 수업이었다.
첫 시간이니까 그저 교안이나 한번 읽고 끝내겠지 했던 내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카우보이 차림의 여교수는 듣도 보도 못한 책을 스무권쯤 들고 들어와
하나씩 들어가며 설명했다.
학생들도 마치 그런 책은 골백번도 더 읽었다는 듯 열띤 토론을 벌였다.
처음 간 곳에서,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전혀 생소한 책들을 보는 기분,
그것은 한마디로 사방이 꽉 막힌 막막함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드디아 수업을 마치고
터널터널 기숙사로 돌아오는데,주위에는 인적도 없고 하늘에는
추석이 가까웠는지 유난히 큰 보름달만 휘영청 밝았다.
건너편 음대 쪽에서 누군가가 부는 처량한 색소폰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때리면서 지독한 향수가 밀려왔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의 그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순간 목발 하나가 부러지면서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나둥그러졌다.
엉겁결에 겨우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혼자서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주위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어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길바닥에 주저앉아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가끔 목발과 보조기 없이 꼼짝할수 없는 상태로
길바닥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고 있는 악몽을 꾸곤 했었다.
그 느낌은 비참한 좌절감,지독한 당혹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보니 그것은 꿈속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당혹감도, 슬픔도, 좌절감도 아니었다.
그냥,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나 혼자 4차원의 세게에 떨어진 것 같은,유리벽 속에 갇혀
아무리 소리쳐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그런 고립된 세상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곳에 영원히 버려진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마음은 오히려 담담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지나가던 사람이 기숙사로 연락해 룸메이트 바버라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그때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 시간은 아직도 내 일생에
가장 잊지 못할 시간 중 하나이다.

다음날 뉴옥에 살던 오빠가 급히 올버니로 와 함께 가서 산 것이
바로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목발이다.
독일제였는데,내게는 너무 길어서 주인이 길이 조정 나사못을
맨 밑바닥에 박아 가장 짧은 길이로 만들어 주었다
부러진 목발보다 나무도 훨씬 더 튼튼해 보였고,항상 겨드랑이가 아파서
어머니가 두텁게 붕대를 매어 주시던 어깨받이는 탄력성 있는 검정색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 전혀 배기지도 않았다.
손잡이도 내 손에 꼭 맞아 그야말로 맞춤목발 같았다.

원래 물건값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지만,그 목발의 가격은 분명히 기억한다.
11달러였다.
어떻게 그렇게 쌀수 있었는지 모르지만,당시 환율이 520원이었으므로
세금까지 합쳐 단돈 6천원에 내 다리를 산 셈이다.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유학 첫날
그 이상한 세계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나를 다시 일으켜 준 목발은
그때부터 이제껏 22 년동안 내 몸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영어로는 목발을 crutch라고 하는데,여기에는 "정신적 지주' 라는 뜻도 있다.)

목발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을 내 목발은 주인과 함께 늙어,
이제는 전신이 다 긁힌 자국이요,이리저리 음푹 패고 불에 탄 자국까지,
크고 작은 상흔들로 덮혀있다.
하필이면 조심성 없고 칠칠치 못한 주인을 만나 목발 팔자치고는
참으로 센 팔자지만 ,여전히 조금도 휘임없이 꿋꿋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다.
.
.
.
얼마후 에는 미국에 사는 언니가 미제 목발 한 세트를 보내왔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지 유행의 첨단을 걷는 목발 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전체가 번쩍번쩍 빛이 나고 어깨받이와
손잡이 테두리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주홍색 선이 둘러있어
나의 낡은 목발과는 비교가 안되는, 이제껏 내가 본
목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목발이었다.



Secret
Garden / Passacag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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