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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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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5-04-17 23:07 조회4,3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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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한 북한주민이 1999년에 월간조선에 보내온 手記중 일부이다. 그해 7월호에 '아버지, 아 하세요'란 제목으로 실렸다. 일부를 뽑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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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이었다. 식량 여유가 한 알도 없는 노동자 생활에 한달 반이 지나도록 배급 준다는 소리가 감감 무소식이다. 억수로 퍼붓는 장마비로 어디 나가볼 수도 없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연3일째를 꼬박 굶고 있었다.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을 말로 달래기에는 너무하다 싶어 궁리에 궁리를 짜내던 나는 아내와 토론하여 텃밭에 있는 옥수수를 따다 삶기로 하였다. 8월 보름쯤에 가야 첫 강냉이를 먹는 평안도 지방에서 7월의 옥수수라야 점이 형성되는 정도의, 말이 옥수수지 껍질에 불과했다. 어쨌든 아이들을 위하여 가마 안에 앉히고 불을 지폈다. 먹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이 비쳐오자 울음바다였던 집안에 단조로운 공기가 떠돌았다. 아이들은 가마목에 둘러앉아 어디서 힘이 났는지 재잘거리며 옥수수가 익기를 이제나 저제나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는 아이들을 보기가 안쓰러워서인지 아내는 문밖에 나가 서서 폭우가 쏟아지는 대지를 멍청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아내가 광란하는 대지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나한테 시집와서 언제 한번 마음 편하게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지난날을, 아니 희망이 없는 가련한 자기의 처지를 한탄했으리라. 아이들의 간절한 기대와 염원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가마 안에서 드디어 김이 나기 시작하였다. 『야! 야! 야!』하는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내 주먹만한 아이들의 위도 채워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올라 나는 공연히 아내에게 소리쳤다.

나의 꽥 소리에 처마 밑에서 멍하니 서있던 아내가 놀라서 들어오며 푸르딩딩한 나에게 『갑자기 신경질은 웬 신경질이오』 한다. 나는 아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그 잘난 것이 뭐 익고 설고 할 것이 있소? 당장 꺼내서 하나씩 나누어 주오』
사실이 그랬다. 소여물 같은 것이 익으면 무엇이 익고 설면 무엇이 선단 말인가! 이러는 나를 아내는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한숨쉬며 부엌으로 내려섰다. 아내는 젓가락으로 옥수수 한 이삭씩 밑을 꿰어서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에 쥐어 주면서 잊지 않고 중얼거린다.

『야! 이게 다 여물면 실컷 먹을 수 있는건데. 쯧쯧』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어머니의 속마음은 아랑곳없이 호호 불면서 소처럼 그 야리야리한 이삭을 야금야금 씹어 삼킨다. 어린 것들의 그런 모습 앞에 아내의 눈가엔 피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그해 한 50평 정도 되던 우리 집 텃밭은 배급을 끝내 주지 않아 이런 식으로 절단이 나고 말았다. 소처럼 이삭째로 씹어서 들크므레한 즙을 짜먹고 속대는 꼭꼭 씹어서 소금 한 알을 입에 넣으면 그런대로 안 먹은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는 옥수수밭을 걷어내고 무를 심어 가을에는 생무로 끼니를 때웠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한 끼에 한 개씩 배정했다. 막내아들인 ○○이는 자기의 특수성을 운운하며 어머니에게 한 개를 얻어먹고는 나를 구슬려 또 한 개를 얻어먹는 수를 써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어느 손가락이 안 아팠으랴. 어린 것 하나를 생각해 주자면 말없이 누워 있는 큰 것들이 불쌍하여 골고루 하나씩 더 먹게 하였다.

多心(다심)한 아내는 아이들이 벗겨버린 무껍질을 잘게 썰어 말려 두었다가 쌀 뜨물이나 국수 씻은 물을 정제하여 그 앙금으로 다시 죽을 쑤어 끼니를 보장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면 자리에 누워서 童心(동심)의 세계를 펼쳐갔다. 우리 사회에서 일명 「리론식사」라고 하는, 말로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福(복)은 쌍으로 안 오고 禍(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백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 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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