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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름다운 macho,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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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작성일2005-03-16 13:22 조회5,1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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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된 기사이지만, 출처블로그 : YKBlue 월간 바자(2002. 8.)의 김경숙이라는 인터뷰어가 썼다.

<칼의 노래>를 쓴 저널리스트 겸 작가 김 훈.

  그는 정의로운 언설이 넘치는 이 시대의 가장 특이한 풍경이었다.그는 이 시대의 지성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macho였다. 1948년 서울 출생. 휘문 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 영어영문학과 수학.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2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웬만한 작가는 그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글 잘 쓰는 문학 기자로 유명했다. 좋다는 언론사 편집국장도 했다. 하지만 그 동안 사표를 한 20번 썼다. 한 번은 사직서에 '사직합니다' 다섯 글자만 썼다. '안녕히..'라고 세 글자만 적은 적도 있다. 더러워서 그만두는데 너무 많이 적어주기 싫었다. 그 중간에 여행하고, 술 먹고, 글쓰는 낭인 생활도 꽤 여러 번 해치웠다.

1995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소설가 데뷔.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 동안 산야를 떠돌며 쓴 <자전거 여행>으로 꽤 유명해졌다. 그 책을 팔아 자전거 월부 값을 갚았다. 그런데 <시사저널> 편집국장으로서 경쟁지 <한겨레 21>과의 대담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또 사직서를 썼다. 1980년대 5공 정권을 찬양하는 글을 썼던 그는 '그 더러운 전력'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고, 여성이 열등하다고 하여 macho로 낙인 찍혔다. 김 훈은 2000년 가을 초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겨우 쓴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 문학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 봄 한겨레 신문 사회부 기자로 '백의종군'하였다며 사람들은 추켜세웠다. 그는 요즘 매일 아침 무거운 배낭을 메고 종로 경찰서로 출근하고 있다. 그의 나이 쉰 다섯이다. <칼의노래>는 지금까지 10만 부나 나갔다. 10만이면 작가로서 최소한 밥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얘기다. 

김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 먼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 여행>같은 그의 산문집을 읽는다. 먼저 간신히 30페이지를 넘기면, 그의 화려한 수사학에 기겁하게 된다- 눈 밝은 독자라면 금방 반하게 될 터이지만-. 겨우겨우 70페이지를 넘기면 철학과 역사학, 지리학을 넘나드는 그의 방대한 인문학적 사유에 기가 죽는다. 하지만 150페이지를 넘기면 울고 싶어진다. 그가 아무리 어려운 말을 늘어놓아도 이제 기가 죽지 않는다.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그 삶의 눈물겨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소설 <칼의 노래>를 읽으면 그냥 한 남자가 보인다.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 작가가 아닌 한 남자 김훈과 오버랩된다. 그렇게 글과 인간이 일치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텍스트 밖에서 김 훈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말붙이기 어려운 저널리스트 출신의 소설가가 보인다. 그리고 풍문으로 듣고 그가 각성하지 않는 한심한 'macho'였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그런데 직접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번 만나면 자기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분명한 매력적인 엘리트가 보인다. 두 번 만나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 만나서 혼자 꾸역꾸역 가는 김훈이라는 실존적 자아가 눈물겹다. 내가 만난 사람은 불완전하지만 가장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한 사내였다. 나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자기 세계를 열어 보여준 사람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일산의 한 카페에서 김훈을 만났다. 일요일 오후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노란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티셔츠 목 둘레에 안경과 선글라스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처음엔 뭔가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이 부담스러워 피난처를 찾아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고려대학 영문학과를 잠깐 다니긴 했지만 고졸인 그의 입사를 결정하며 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눈빛이 불량해서 기자는 할 수 있겠다. 에라 들어와라."

  그 눈빛이 바로 저런 것이었을까? 기자로서, 작가로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 나는 초장부터 기가 죽어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커피를 아주 제대로 하는 집이에요." 그러고는 본인은 팥빙수를 시켰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동네 까치들이 둥지를 지을 때 우리집 개의 털을 내장재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우리 개가 마을의 아름다움에 기여한 공로를 동네 반상회에서 보고하려 했는데 아이들이 말려서 못했다.- <아들아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그의 글이 생각났다. 그의 나이 쉰 다섯이다. 팥빙수를 먹는 그를 보며 왜 그 대목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제서야 그에게 명함을 내미는데 여전히 내 손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가 내 명함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는 "서울 경에, 맑을 숙인가요?" 하고 물었다. 어떤 집단이나 대의 명분보다는 개별적인 인간과 그 내면이 더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다웠다. 나는 다시 그가 마암 분교 아이들에 대해 쓴 글-<자전거 여행>-을 떠올렸다. 섬진강 상류에 있는 마암 분교 아이들의 일상을 꼼꼼히 들여다본 아주 착한 글이었다. 그런데 '김인수는 3학년이다' 하는 그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나는 정말 울컥 목이 메었다. 읽어본 사람들은 안다. 왜 그런지. 솔직히 그의 문장은 모국어로 만들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하지만 나와는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문장과 화해하고 그의 글과 영혼에 엎드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쓴 그의 몇몇 글들은 문체에 관하여 그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작가인지 말해주었다.

  인터뷰는 그의 집필실에서 이루어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샤워실이 딸린 작은 방이었는데, 생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여름 한낮에 한기가 느껴졌다. 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에 원고지 한 장과 짧은 몽당 연필 한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원고지 가득히 중요한 단어를 적으면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답변해 주었다. 나중에 들어본 내 녹음기엔 낮고 단호한 그의 목소리와 함께 중간중간 술 잔 내려놓는 소리가 함께 녹음되어 있었다.

  언론사 구조상 초년 시절에 거치는 코스라 할 수 있는 경찰서 출입 기자를 택한 이유는? 그것도 하필이면 '악연'이라 할 수 있는 한겨레를...

 "뚜렷한 동기는 없었어요. 많은 언론사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거죠. 기자를 오래 했으니까 현장으로 간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물고기가 물로 가는 거랑 똑같은 거죠."

하지만 <칼의 노래> 이후 돈벌이는 이제 그만하고 음풍 농월하며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음 그랬는데, 너무 방에만 박혀 있으니까 머리가 관념과 추상 속에 빠져서 현실 감각을 잃고 바보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식물처럼 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식물.... 그래서 역시 현장에서 좀 더 있는 것이 나한테는 건강한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갔죠. 심사숙고하지는 않았어요. 어떤 경우라도 별로 오래 생각하지는 않아요. 신문사를 나오고 들어가고 할 때도 언제나 10분이면 족했어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느끼는 것들이 있나?

"젊었을 때는 기자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세상에 많은 측면 중에서 자기가 관찰한 사소한 측면에 대해서 말하는 거죠. 기사로 진실을 말하기는 불가능해요. 자기가 보고 겪고 들은 것을 자기의 편견과 자기의 시각에 따라서 쓰는 것이고, 그 결과는 이 세상의 무수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한 사소한 것이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측면이 있잖아요. 어떤 각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인데, 자기가 본 측면만을 가지고 '이것이 정의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아마 누구도 절대적인 진실을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욕망을 버려야죠. 쉽지 않은 일이죠. 나도 젊었을 때는 '이것이 진실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좋은 작가에 대한 생각은?"

황석영이나 조정래처럼 사회 전체의 구조를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사람이 좋은 작가죠 그런데 나는 그렇게 못해요. 안 보여. 나는 개별적인 인간의 내면만 보고 쓰는 사람이죠. <칼의 노래>도 그렇잖아요. 나의 한계라면 한계죠. 도리가 없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거죠. 나는 안 보인다니까. 그분들은 큰 작가고, 나는 힘없고 작은 작가죠. 그건 분명한 거죠. 게다가 난 벌써 노인이잖아."

그런데 힘없는 노인 이름 앞에 사람들은 왜 '청년' 자를 붙이나?

"내가 주책 떠니까. 짧은 반바지 입고 자전거 타고..."

<칼의 노래>를 영화화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젊은 작가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다 해보라고 했어요. 반대할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자금을 구하는 게 쉽지 않나 봐요. 海戰을 찍어야 하니까 한 100억쯤 있어야죠. 어떤 놈은 자금이 없어서 海戰을 빼고 하겠대, 陸戰만 하겠대, 그래서 '그러려면 그만둬라' 했어요. 해전을 빼면 이순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구태여 할 필요가 있느냐,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어휘를 습득할 수 있었나?

"내가 쓸 수 있는 어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국어사전에 있다고 해서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 가령 혁명, 진보, 자유, 이런 언어들이 사전에 있지만 나는 그걸 끌어다 쓸 수 없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줄어들어. 내 사전이 점점 얇아지고 있어요. 이젠 정말 몇 마디 안 남았어요.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겨우 노랗다, 빨갛다, 춥다, 날이 어두워진다 같은 확실한 것들 뿐이예요. 이런 말 몇 개를 가지고 하는 거예요. 겨우...."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고, 운전 면허증도 없다고 들었다. 디지털 문명에 대한 거부인가?

"아니예요. 나는 불구자 같아요. 기계 만지는 걸 싫어하고, 글도 컴퓨터로 쓰려고 하다가 결국은 실패했어요. 컴맹이죠. 하지만 도리가 없어요. (깜박이는 녹음기를 벌레 대하듯 가리키며) 이런 것도 만지기가 싫어요. TV 리모콘도 애들 불러서 켜라고 해요. 시계도 '1234'가 있는 아날로그여야 해요. '1234'가 없으면 봐도 몇 시인지 모르겠어. 사실 컴퓨터를 못 다루면 기자 생활하기가 정말 불편해요. 출입처나 관공서에서 기자들한테 주는 모든 정보를 컴퓨터에 올려놓거든요. 그건 기자한테 중요하죠. 나 하나 때문에 팩스를 보내거나 복사를 해줘야 하니까 그들도 내가 짜증날 거예요. 나라는 인간은 새 매체와 새 시대와 접목이 안돼요. 하지만 배워서 하기는 싫어요.."

<칼의 노래>를 보면 이순신이 아니라 김 훈이 보인다. 결국 자기 얘기를 한 게 아닌가?

"그렇죠. 희망이 없다! 그런데 희망이 없는 세계에서도 살아야 한다. 희망 없는 세계에서 희망을 말하지 않고 사는 거죠. 그래도 무의미한 이 세상과 끝까지 싸워보겠다."

이 시대에 이순신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런 리더십이 필요한지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여러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혼자 거꾸로 갈 수 있지 않으면 리더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해요. 이것은 참 반민주적인 생각이죠.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을 바탕으로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여러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이를테면 우리시대의 가난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적 바탕이 우리사회에는 충분히 있어요. 가진 자들이 자기 것을 조금씩 희생하면 되는 거죠. 하지만 부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리더가 없으니까, 이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죠. 내 생각도 참 공상에 불과한 거죠."

월드컵을 보면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느낀 것들은?

"온 국민이 응원했다지만 길거리 응원의 주역은 10대, 20대들이죠. 이 녀석들이 기성세대에 의해서 사육된 노예 같은 놈들이라구. 학교에서 '국영수'나 배우고, 입시지옥과 취직지옥에 시달린 가엾은 놈들.... 그런데 그놈들에게도 그렇게 힘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가웠어요. 저 놈들을 억압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성세대가 아무리 짓밟아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발랄한 놈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태극기를 두르고 나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애국심이고 공동체 의식입니까?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정신 나간 소리지. 그냥 한바탕 논 거죠. 자기네 세대의 힘을 과시한 거죠."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을 주는데, 친구는 있나?

"친구가 없어요. 또래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 열 살 아래죠. 우리 마누라도 이상하대요. 그런데 쉰 다섯 먹은 사내 새끼들이라는 것은 대부분 썩고 부패해 있거나, 일상에 매몰된 아주 진부한 놈들이거든요. 그래서 상대할 수가 없어요. 그럼 내가 젊은 놈들하고 통하나? 그렇지도 않아요. 난 사실 20대도 싫어. 젊은 놈들만 보면 그런 놈들의 나이를 다 졸업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져. 저런 무지몽매한 자식들하고는 이젠 상종할 일이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는 '킥' 웃었다.) 그놈들이 뭐 부럽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 시절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무질서와 몽매 속에서 사는 걸 '청춘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외롭지는 않나?

"글세, 외롭긴 뭐가 외로워. 일하느라고 피곤하고 그런 거지. 사람들이 작당해서 나를 욕할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니 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니들 마음대로 해봐라. 니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내 말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내 내면의 진실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도 외롭지는 않대. '저까짓 새끼들쯤이야' 하는 생각도 있었을 거예요."

'자전거'가 골수 보수주의자 김 훈 식의 진보라고 하던데...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예요. 글쎄, 나는 그냥 희망 없는 세상에서 사는 힘없는 늙은이지. 진보는 무슨 얼어죽을 진보야. 그리고 난 진보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수가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 반대도 아니야. 가난뱅이가 선하고 부자가 악한 게 아니듯 그 반대도 아니야. '이 집단은 선하고 저 집단은 악이다'는 성립이 안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죠.(화가 나는지, 아니면 절망스러운 것인지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탁자에 '탁' 내려놓는다). 인간을 집단화하는 개념들 있잖아요. 민중이라든가, 연대라든가, 혹은 보수나 진보.... 나는 그런 걸 다 신뢰할 수가 없어요."

시대와, 조직과, 상사와, 하사와의 불화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정말 화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정말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 선하고 도덕적이라고 확신하는 자들이에요. 그런 인간들과는 화해할 수 없고, 그런 인간들을 난 경멸해요. 난 나자신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확신이 없어요. 이것은 내가 부도덕하게 살아왔다는 얘기가 아니예요. 그건 좀 다른 얘기죠. 칸트나 공자가 말한 도덕성에 도달한 인간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거죠. 조마조마 위태로운 지경에서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확신을 가진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안 되어 있는 놈들이라는 겁니다."(탁!)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김 훈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집에서는 굉장히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인간이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그렇게 배웠거든요. 어렸을 때 우리끼리 이사하고 나면 아버지가 5일 만에 나타나셔서 '어디서 이런 집을 얻었냐'며 호통을 치셨어요. 그래도 숨소리 한 번 못 냈어요.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너무 좋았어요. 가부장의 마초니까. 아마 저도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집안에 별 문제는 없었어요. 가부장 밑에서 평화롭게 아무 문제없이 살아요."

여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연애는 안 하나?

"연애는 안 해요. 하지만 여성을 볼 때 설명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자주 느껴요. 내가 다음 번 소설로 쓰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연애 소설인데, 내 개인의 야심은 그걸 완성해서 여류 작가들의 연애 문학이라는 것을 일거에 폭파시켜 버리려고 해요. 다 폐기 처분해야 할 정도로, '여성성의 본질과 아름다움, 경이로움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고 싶은 거죠. 실패할 수도 있지, (웃으며) 실패해도 할 수 없지 나로서는... 생명의 강력함이 없고 생리통 걸린 여자 신음하듯이 앓는 소리나 하는 연애 소설들이 많잖아요. 나는 그게 싫어요. 이제 초고를 썼는데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잘 안돼요."

그걸 잘 쓰려면 여자에 대해서 공부 좀 해야 할텐데...

"나는 여성지를 많이 봐요. 특히<알뤼르> 같은 라이선스 패션지를 많이 보는데 거기 나오는 여자들을 보기 위해서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미녀들이 거기 나오거든요. 다른 데서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떤 분이 저보고 '썩은 자본주의의 타락한 끝물을 보는 거다' 라고 하더군요. 틀린 얘기가 아니죠. 하지만 거기 나오는 여자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내 마음도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억울하다는 듯이...) 아름다운데 어떻게 할 거야? (좀 더 흥이 나서...) 지난번에 보니까 특집에 여름 샌들이 수도 없이 나와있는데 너무 예뻐서,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그것만 봤어요. 그런데 그 샌들이라는 게 너무 비싸더라구. 노동하는 사람들이 보면 이가 갈리겠어. 하지만 아름다운데, 어떻게 할거야? (웃음)"

그 남다른 감성과 세계관은 어떻게 형성되고 훈련된 것인가? 솔직히 성장기가 궁금하다.

"나는 어렸을 때 무지 가난하게 살았어요. 세 살 때 6.25가 나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갔으니까 집도 없이 오죽했겠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어른들은 술 먹고 싸움을 하더라고. 그때 어른들을 무지 미워했어요. 그리고 어린 마음에 전쟁이 뭘까? 어른들은 이런 짓을 뭐 때문에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나?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아이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슬프게도 그렇게 외곬수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세상에 대한 회의와 소외감. 나는 어렸을 때 세상이 왜 그런지, 어른이라고 하는 것들이 왜 그런지 정말 몰랐고,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어요. 어른들이 대답할 수 있겠어요? 어른이 된 지금도 알 수 없죠. 그래서 지금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인간은 본래 그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대학을 다닐 때는 더 참담했어요. 교련수업 반대한다고 학생들이 1년 내내 데모를 했어요. 그런데 나는 애들한테 그랬거든요. 내 생각엔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교련을 받고 1년 내내 공부를 하는 게 우리한테 더 득이 될 것 같다. 그때 나는 완전히 썩은 미친놈이 된 거야. 기회주의자. 그런 많은 갈등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못 다니겠더라고, 1년 반 다니다가 관두었어요. 물론 돈도 없었죠."

젊은 아가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없나?

"자신들의 성적인 매력을 사회적으로 큰 메리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 '아줌마' 문제가 있잖아요. 아줌마라는 것은 여자가 성적 매력을 상실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경멸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아줌마들을 가장 무시하고 천대하는 것이 젊은 여자들이에요. 남자들보다 더 지독한 경멸을 퍼붓죠. 그런데 그건 결국 우리가 너희들보다 암컷으로서 더 우월하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 참 한심한 거지. 저것들도 곧 늙을 텐데, 10년은 금방 가는데...."

(중략)

김 훈은 인터뷰 중간에 '내가 왜 macho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내가 macho라서 그렇다' 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농담처럼 인터뷰 기사에서 자기를 '아름다운 macho'로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건 정말이었다. 김 훈은 내가 아는 엘리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마초였다. 매력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대다수 지식인들과는 달랐다. 독도 약도 되지 않는 해설만 늘어놓을 뿐, 도대체 자기 생각이라는 걸 말하지 않는 한심한 지식인하고는 종자가 틀렸다. 그의 말은 어느 인문서나 혹은 신문사설, 혹은 심포지엄 같은 곳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몸으로 느끼고 스스로 각성해서 얻어낸 진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편견'에 반했고, '편견'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그 오만한 솔직함에 홀렸다. 어느 저널리스트가 러브호텔의 본질은 일부일처제의 맹점이라면서 '러브하겠다는데 뭐가 나빠? 조악한 건축물이 화가 날 뿐이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소설가가 후배 결혼식에 가서 주례사로 '여자는 요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나는 그가 정의롭지 않아서 좋다. 예컨대 그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남자다.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무서운 자기 성찰! 그는 자기 배설물을 들여다보는 남자였다.

나는 또한 그가 '실패한 저널리스트'라서 좋다. 그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영자에게 쏟아내는 언론의 도덕적인 분노가 두렵고, 신창원의 웃통을 벗겨 문신을 보여주는 게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니다.-<아들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의롭고 진실한 언론의 책무와는 그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지금도 그렇다. 또한 그는 온몸으로 세상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시대의 최대 폭력은 연장자들의 권력이라고 말해 놓고, 술자리에서 젊으나 늙으나 투표권이 똑같이 한 장이라는 건 불공평하다며 자기한테는 스무 장을 달라고 우기는 사람이었다. 그래 놓고는 그 말은 결국 다른 게 아니라면서,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말했다. '사내다움이란 무질서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나는 다시 여자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를 쳐다본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여성성에서 관능을 느낀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겠다'고 하지 않던가? 드넓은 오지랖이다. 비오는 거리에서 맡은 한 여자의 지분 냄새에 쩔쩔매지만, 그는 통속적인 기준의 美醜를 넘어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남자였다. 충무공이 그랬든 그는 손등이 터지고 몸이 더러우며 날 비린내가 나는 서른 살의 관기(官妓)를 품을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몸으로 느낀 그 관능을 글로 쓴다. 그래서 macho고, 그래서 macho가 아니기도 했다. 큰 남자는 결코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그 동안 밥을 버는 일을 충실해 해왔다. 그게 사내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이 나이 쉰 다섯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언제고 다시 초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달랑 볼펜 한 자루면 만족할 터이다. 결코 칼로 베어질 수 없는 집단과 싸우고 있는 그는 머지않아 또다시 사표를 쓸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 이 시대의 가장 빼어난 자아, 김훈이라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하기 위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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