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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이 곳을 단단히 붙들어라-권지예('83 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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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학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5-03-02 23:30 조회4,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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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전] 이 순간, 이 곳을 단단히 붙들어라-권지예 (조선일보)

권지예 소설가

입력 : 2005.02.25 17:41 36'

 
며칠 전 봄의 길목에서 내린 함박눈 속에서 한 유명 여배우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평소에도 여느 발랄한 스타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좋아했던 배우였다. 어딘지 삶의 그늘을 아는 듯한 비의(秘意) 서린 얼굴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꽃다운 스물 다섯,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놀라움도 놀라움이지만 애틋한 마음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자꾸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영화 장면처럼 떠올랐다. 그 생(生)과 사(死)의 찰나적 경계에 선 한 인간의 고뇌가 안타깝게 떠올랐다.
내 소설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나 또한 어렸을 때 자살을 상상한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늘 해 왔다. 죽음에 발을 내디디는 최후의 순간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간혹 전율이 인다. 인간은 도대체 죽음 직전 어떤 순간에 삶의 지속성을 조롱하듯 죽음의 의지를 발동하여 영원을 향해 ‘번지 점프(bungee jump)’를 하는 걸까. 두렵진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의 자살자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들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방법인 총기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고 여자들의 대부분은 독이나 약을 이용한다고 한다. 54세 이상 나이가 든 여성은 자신의 몸에 전혀 손을 댈 필요 없는 투신자살을 선호한다는 통계도 있다. 이 통계를 보니 자연스레 자살한 여성예술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죽어서 페미니즘(feminism)의 신화 속에 천재 예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수면제 과용(過用)으로 자살한 서른 한살의 전혜린, 주머니 가득 돌멩이를 집어넣고 아침 산책길의 강물로 걸어들어간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자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우유와 버터 바른 빵을 준비해놓고 수면제를 먹은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은 시인 실비아 플라스.

주변에서는 여배우가 자살한 것은 전라(全裸)의 베드 신(bed scene)을 찍은 영화 때문이란 말도 있다. 만약 이것이 자살 이유라면 더욱 애틋하다. 이것은 오직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살의 이유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이유로 죽기는커녕 괴로워라도 하는 남자 배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현상은 문학판에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벗는 연기에 수치심을 느끼고 상심하는 여배우처럼, 종종 리얼한 성 묘사나 ‘불륜 소설’을 쓰는 이 땅의 여성작가들은 남성작가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기도 한다.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여성 예술가들이 사실은 사회적으로는 가장 뻔뻔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삶은 엄숙한 것이고 축복이라고 배워 왔지만 우리 삶은 또 얼마나 불안정하고 주관적인지…. 한편에서는 웬만한 여자 연예인들이 전라로 누드(nude) 촬영을 해 돈을 벌기도 하는 세태에서, 섬세하고 내성적인 연기자는 자살을 하니 말이다.

여배우의 자살 기사 옆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옛 발해의 해상 교역로 탐사에 나섰다가 조난당했던 대원들의 극적 생환기가 실려 있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다만 살아있는 현재의 이 순간을 맘껏 사랑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장에 써 있던 제임스 조이스의 글귀처럼.

“이 순간, 이곳을 단단히 붙들어라. 미래는 남김없이 이곳을 지나쳐 과거로 몸을 던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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