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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서혜석 동문('76 졸)에 관한 기사

작성자 방영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05-01-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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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계약성사의 일등공신 변호사에서 정치가로 서혜석  (200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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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입안자 되어 경제 살리기로 봉사의 새 길 갈 터”

그녀는 유명 대기업들의 대형 국제 거래나 협상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언론이나 정치계와 거리를 두고 살아온 터라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일해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능력에 탄복한다, 숨겨진 정치인 서혜석의 끼를 정책으로 봤으면 하는 것이 괜한 바람일까.

 어렵고 힘겨운 변신의 멋진 결실
결혼과 함께 직장과는 영영 이별. 당연한 것에 의문은 없었다. 연구원으로 있는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다. 한국 아줌마가 공간 이동만으로 스타가 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두 아이의 엄마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서혜석 아줌마는 남편의 권유로 로스쿨에 들어간다. 한국식 계산으로도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반응은 미국의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1985년. 그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여겼겠지만 이것이 인생 대역전의 아줌마 신화를 여는 서막일 줄이야.

그로부터 20년, 서혜석 국제변호사(50)는 한국의 플랜트 수출에 없어서는 안 될 보배다. 조 단위의 돈이 오가는 국제 계약은 그녀의 손을 거쳤을 때만 안심할 수 있다. 그녀의 손은 미다스고, 사인은 보증수표인 셈. 수십 수백 조를 주무르는 서혜석 변호사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의 경계선 밖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밤샘 작업에 대한 위안은 완결된 두꺼운 클리어 파일이 전부. 그것을 책꽂이에 꽂고 안도의 미소만 지으면 그뿐이었다. 일은 앞에서 하고 영예는 뒤에서 지켜볼 뿐.

그런 그녀가 또 다른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민생경제특별본부 부본부장으로 명함을 바꾼 것. 항상 뒤에 있던 그녀가 이제 전면에 나서 ‘먹고사는 문제’에 희망을 제시해야 할 순서가 된 것이다.
“예전에 정치하려는 젊은 변호사에게 정치 입문을 말리는 편이었어요. 변호사는 10년 정도 되어야 업무가 무르익거든요.

그러면 사회에 봉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전문가로 인정받기도 전에 뛰쳐나가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몸을 던지냐는 생각 때문이었죠. 제 경우는 변호사가 된 지 17년이 되어 전문가라 자임할 수준이 되었고 정치도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 같아 마음을 굳혔어요. 하지만 시니어로 있는 법무법인 우현의 변호사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입당 안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다행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돌아보면 너무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 변신의 힘은 가족이었다. 정치에 입문했을 때 딸이 한 말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할 밖에.

“‘전문적인 일을 하는 엄마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 사람들이 연락을 한 거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할 일이 들어오네’라고 하더라고요. 그간 나만의 일에 빠져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했거든요. 생각해보면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몫을 못 한 만큼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결혼 후 직장도 그만둔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대학원을 권했던 남편의 혜안도 180도 선회한 인생을 살게 만든 동기일 터. 결혼 전 독일에서 근무할 때,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본 것이 아내의 ‘달란트’를 살려주려는 배려심을 갖게 한 것이다.

사실 첫 직장도 영어 속기 전문 비서로 전문직이었지만 결혼한 여자의 사회적 평가는 제로였다. 남편의 권유도 있고 해서 대학(이대 영문과 '76년 졸업)의 전공을 살려 서울대학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월이면 대학원 입시가 끝난 시기인데, 정상 대학사원 학사 일정이 늦어져 운 좋게 입학했다. 대학 시절부터 집중력은 남다른 편이어서 다른 공부는 안 해도 고전 영문소설은 거의 독파했고, 그 때문인지 한글보다 영어 읽는 것이 더 편한 정도였다. 그런 집중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교수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 듯하다. 그녀에게 주 9시간의 학부 강좌도 맡겨졌다.

그러나 1982년 정부출연연구소에 다니던 남편이 미국으로 전근을 가면서 또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3년이 흐른 후, 그녀의 인생에 방향타 역할을 하는 남편이 로스쿨 입학을 권했다.
그녀는 남편 말을 따라 사는 곳에서 가까운 산타클라라 법과대학원 입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못사는 나라 사람이 잘 사는 나라에서 살려면 모든 것을 아껴야 하는 상황. 시험 준비용 참고서를 구입할 처지가 아니어서 시립도서관에서 몇 년은 족히 묵었을 참고서를 빌려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갓난애 하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네 살배기 아이 손을 잡고 시립 도서관에 다니던 그녀가 사서 눈에 이상하게 보였을 것은 당연하다.

동네 사람들도 잘 해봐야 법무사 시험 볼 사람이 뭣도 모르고 법과 대학원을 준비한다며 입방아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을 돌봐줄 부모 형제도 없고, 남편마저 낮에는 직장, 밤에는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상황에 애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한다고 나다니니 말이 안 나면 이상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수군대던 사람들의 코가 납작해졌다. 동네 사람들의 여망(?)을 뒤로하고 당당히 입학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후 정말 피나게 공부했다. 하루 12시간을 한자리에 앉아 공부했더니 엉덩이 살이 뼈를 덧씌우고 있는 형국이 됐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남들처럼 4년간 공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한 여교수는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녀의 엑센트를 꼬집어서,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로스쿨에는 왜 왔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더욱 오기가 생겨 공부에 매달렸고, 2학년에 올라가서는 평점 4.26를 받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C+ 정도를 받는 상황에서 탁월한 성과였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학위를 취득했고, 졸업과 동시에 응시한 1987년 변호사 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했다. 이보다 더 기쁜 것은 세계 최대의 로펌인 베이커&멕켄지 법률회사 중 가장 어렵다는 샌프란시스코 지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이다.

“너무 제 욕심만 차렸어요. 로스쿨 공부가 너무 힘들어 친정 엄마를 모시고 와서 아이들을 맡겼죠. 그런데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니마저 아버지의 임종을 못 지키게 한 죄인이죠.”

죄스러움을 딸의 달라진 모습으로 보여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하루 14시간 이상씩 매주 6일을 일했다. 얼마나 일에 매달렸던지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부딪혀 귀가 안들리는 증상까지 겪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그녀의 능력을 제대로 펼쳐 기업 변호사로서 입지도 굳혔다.

그러나 1990년 남편이 국내 연구소로 복귀하면서 업무에서 생소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국내에서 국제 없무를 처리하는 유력한 변호사들이 그녀가 한국 내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최근 사법연수원 졸업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특정 분야 전문 로펌에서 국제 거래 자문 업무와 선진국 로펌의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이제 정당에서 정책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실물 경제에 반영하고자 노력해야 할 시점. 뽀빠이의 여자친구 올리브란 어릴 적 별명을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서혜석 변호사의 “한국 경제 살려줘요, 뽀빠이!”란 외침에 한국 경제가 튼튼하게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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