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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이 동문('84, 조선일보 문화부장)의 최근 기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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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아버지 죽이기의 잘못

 
아버지 죽이기는 2004년 한국에서 더 이상 문학적 수사(修辭)이거나 엽기적 패륜 사건이 아니다. 정치적 일상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미당 서정주가 노래했던 그 아버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무엇을 해서라도 밥을 벌어야 했던 초라한 아버지들의 초상이, 광복 60년을 바라보는 지금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미 땅으로 돌아가 흙으로 풍화되었을 그 아버지들에 대한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바로 자식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대표의 경우나 열린우리당 이미경 의원의 경우를 본다.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는 일은 본인들에게도 충격이지만, 과거사야 어쨌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기 바쁜 여염 사람들에게도 충격이다.

몇 해 전, 미국에 입양돼 전문직으로 성장한 아들이 자기를 버린 부모를 찾아 한국에 왔다. 어렵사리 찾아낸 아버지는 살인범으로 감옥에 있었다. 그 아버지를 향해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건 저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건강에 유의하시라”고 뜨거운 사랑을 보냈다.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각계 인사들의 ‘아버지의 추억’ 속 아버지들 역시, 일제 치하와 6·25,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겪으며 어떤 식으로든 뒤틀어진 상처를 간직한 이들이다. 그런 아버지들을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연민하며 자식들은 어른이 되어왔다. 그리고 자기 자식들은 아버지 때보다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이나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아버지 죽이기’의 문학적 전통이 있고, 프로이트도 모든 아들에게는 살부(殺父) 본능이 있다고 했지만, 불교에서는 아버지 죽이기를 최악의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이르는 다섯 가지 죄(五逆罪) 중 첫째로 꼽는다. 아버지의 삶을 단죄하는 일은, 당사자에게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함께 살아내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이고 치욕이다.

제 나라를 일본 식민지로 만들며 근대 민족국가 설립에 실패한 뒤, 우리들 아버지는 죄인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출발부터 아비 잃은(없는) 이들의 문학이었다. 최초의 근대 소설 ‘혈의 누’의 여주인공은 청일전쟁 중에 부모와 헤어진 뒤 새로운 삶을 열어간다. 가부장 국가의 실패는 곧 아버지의 실패였던 셈이다. 일제하를 벗어났어도 분단과 전쟁, 그리고 억압된 정치 체제는 연속되는 아버지의 실패를 의미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는 광부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고,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신경림 ‘아버지의 그늘’)는 아들들을 만들어냈다. 유신과 군사 독재의 70년대를 청년으로 살던 이들은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이성복 ‘어떤 싸움의 기록’)기까지 했다.

해방둥이가 환갑을 맞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무덤 파헤치기 소용돌이로 어수선하다. 정부와 여당은 과거사 진상 규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만든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 가족사 캐기와 결과적 연좌제로 가고 있다. 죄 많은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해야 할 일이 어디 공개사죄뿐일까. 아버지 시대가 어떤 시련과 죄악을 안고 있었는지, 그 시절에 오늘의 나를 한 번쯤 대입하고 고통스러워해 볼 일이다. 아버지를 죄 짓게 만든 무능과 무지, 무력에서 벗어나는 사회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일 것 같다.



(박선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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