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佛이어 日서도 출간 김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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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학회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5-05-21 12:31 조회4,499회 댓글0건본문
《작가로서 김훈(金薰·57) 씨의 인생은 시간이 갈수록 강한 힘을 내뿜고 있다. 그의 첫 소설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올해로 나온 지 꼭 10년이 되는데 “채 100권이 안 나갔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하지만 그는 2001년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칼의 노래’를 펴내 동인문학상을 받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세계적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세계 역작 선집 ‘뒤 몽드 앙티에(Du Monde Entier)’에 이 작품(프랑스어판)이 들어가게 됐다. 바야흐로 국제적 작가로 첫발을 떼고 있는 것이다.》
19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에 있는 그의 집필실을 찾아갔다. 봄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50평쯤 되는 반지하의 주택을 혼자 쓰고 있었는데, 그가 정좌(正坐)하자 ‘수루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하는’ 작가의 자세가 나왔다.
그는 “(‘칼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양영란 씨가 애를 많이 썼다. 역사 용어들에 각주 다는 일부터 힘들었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칼의 노래’가 27일 일본 신초샤(新潮社)에서 나오며, 독일어로 옮겨지고 있고,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는 스페인어판이 나올 거라고 설명했다.
일본어판 ‘칼의 노래’라. 프랑스인들이 넬슨 영국 제독의 삶을 소설로 읽으려 들까?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해 신초샤에서 먼저 출간하자고 제의해 왔어요. 다른 데선 몰라도 일본에선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일본인들이 과거 침략을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만 여기지 말고, 외침(外侵)을 막아내야 하는 백성의 고통을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의 집필실에는 칠판 두 개가 있는데 하나에는 집필실 택호(宅號)인 ‘풍화암(風化庵)’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에는 왜란 뒤에 태어나 호란(胡亂) 뒤에 활동한 조선조 문신 이경석(1595∼1671)과 오준(1587∼1666)의 신상이 간략하게 쓰여 있다.
두 사람을 내세운 새 소설을 구상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칼의 노래’와 이어지는 면모가 있었다.
“이순신의 공덕비 비문을 임란 뒤에 썼던 이가 명필인 오준이었어요. 하지만 오준은 병자호란 후에는 우리 땅을 침략한 청 태종의 덕을 기리는 ‘삼전도비’의 비문을 써야 했지요. 욕되고 수치스러워 오준은 미쳐버리지요. 인조 임금이 청나라 군복을 입고 땅에 이마를 비비며 청 태종한테 술잔을 바쳤으니까요.”
그렇다면 이경석은 어떤 이였을까? “‘삼전도비’의 문장을 지은 문장가였어요. 주화(主和)론자였고. 침략자의 송덕비문을 써야 했던 것, 저는 그것이 한 국가가 살기 위한 생존의 몸짓이었을 뿐, 굴욕도 영광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조가 무릎을 꿇어 국토와 민족, 언어를 보존한 걸 훌륭하다고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굴욕 안엔 현실을 극복하려는 장엄함이 있어요.”
뒷날 이경석을 ‘만고역적’이라고 비판한 ‘성리학 근본주의자’ 송시열에 대해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명분으로 ‘과거사’를 말하긴 쉽지만, 과거란 단순하지 않아요. 역사란 복잡다단한 현실이고, 총체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의 책상 위에 매달린 동그란 저울 쟁반에는 그가 쓰다 모아놓은 몽당연필이 수북했다. 저울 쟁반은 한의사였던 할아버지의 것. 그의 아버지 김광주는 상하이(上海)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보좌역이었으며, 광복 후 김구와 함께 귀국한 독립투사다.
김 씨는 자신이 대학생이었을 때 부친이 하신 말씀을 이야기했다.
“해방된 조국에 와서 보니 동포들은 모두 왜놈 밑에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결국 국토와 민족과 언어를 지킨 사람은 (해외 투사들보다) 점령지의 현실을 견뎌낸 그 사람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나이 들고야 그 뜻을 알 것 같았어요.”
새 소설은 어쩌면 그의 성가를 ‘칼의 노래’보다 더 높여줄 관념적 규모와 치열함을 갖추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말하자 그는 특유의 쓸쓸한 웃음을 짓더니 “소설 많이 쓸 생각은 없다”며 “소설보다는 자전거를 더 많이 타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문예지 프로필난에는 그가 ‘자전거 레이서’로 나온다. 최고 기록은 지난해 태백산맥 내리막길에서 나온 시속 54km. 그는 “내 육체로 만든 정직한 숫자 기록이라서 더 소중하다”며 “타고 타다 보면 (택호처럼) 풍화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kkt@donga.com
▼김 훈 씨는▼
△1948년 서울 출생
△1974∼1990년까지 한국일보 기자
△1997년 시사저널 편집국장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2년 한겨레신문 기자
△2004년 ‘현의 노래’ 펴냄
△현재 ‘소설 쓰는 자전거 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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