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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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신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작성일2005-06-28 23:52 조회5,057회 댓글0건본문
기자들은 제가 숨어서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일일이 다 관여하신것을
저는 이번에 확실하게 체험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감사와 경외함으로 바라봅니다.
더소호 www.thesoho.co.kr
이승신 (72)
찔레꽃 뾰족한 가시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 - 호연연가
손호연 지음 이승신 역 은 현재 소호갤러리에만 조금 있어요. 722-1999 이영임에게 문의하세요
KBS 손호연 뉴스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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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2005 Joongang Ilbo
중앙일보 6월 24일 정상회담으로 재조명된 손호연씨 딸 이승신씨
"어머니가 노래한 '단가'의 평화정신 한·일 양국 관계에 스며들게 돼 보람"
▶ 생전의 손호연(앞쪽)씨와 장녀 이승신씨. 손 시인이 들고있는 것은 딸 이씨가 한국어로 번역한 시집이다. [중앙포토]
한국 유일의 단가(短歌) 시인이었던 손호연 여사(2003년에 80세의 나이로 타계)의 생애와 작품세계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20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그의 작품과 평화정신이 화제에 올라 딱딱한 대화 분위기를 다소 누그러뜨린 것으로 전해지면서부터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회담 직후 보도진과 만난 자리에서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이라는 손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나도 그런 마음을 갖고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시가 정상회담 중에 언급되고 고이즈미 총리가 일종의 화답을 하게 된 데는 손씨의 장녀 이승신(갤러리 더 소호 대표)씨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손호연기념사업회(www.sonhoyun.com)' 이사장인 이씨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 관계자들에게 손 시인의 작품집과 그의 일대기를 다룬 60분짜리 다큐멘터리 방송물을 보냈다. 한국 관계자들에게는 일본에서의 손 시인의 영향력을 알리고 '문화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씨는 고이즈미 총리의 회견 장면을 지켜본 뒤 "어머니가 평생 단가를 통해 노래한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한.일 양국관계에 스며들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 시인은 60년간 2000편의 일본어 단가를 썼다. 작품 가운데는 한.일 양국과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들이 많다. '단가'는 31자로 된 5.7조의 짧은 정형시로, 일본에서 와카(和歌)라고 부른다. 일본의 국시(國詩)로 대접받지만 그 원형을 거슬러가면 백제의 향가에 닿는다.
손 시인이 "한국사람이 왜 일본 시를 쓰느냐"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단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백제인의 혼'을 지킨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단가는
'치마저고리 곱게 단장하고 나는 맡는다 백제가 남긴 그 옛 향기를'
처럼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듬뿍 담고 있다.
손 시인은 1941년 일본 유학 중 단가의 대가인 사사키 노부쓰나를 사사했다. 유학 시절을 빼곤 평생을 서울 필운동 한옥에 살면서 시를 썼는데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일본의 유명 출판사 고단샤에서 다섯 권의 '무궁화' 시리즈 등 여섯 권의 시집을 냈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한국어 번역본인 '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호연연가(戶姸戀歌)'가 2002년 샘터에서 출간된 바 있다.
조종도 기자
한국일보 6월 22일
"평생 한-일 평화 노래한 어머니 바람 이뤄졌으면"
고이즈미 日총리 언급 와카 시인 故손호연씨 딸
와카는 향가에 뿌리 둔 노래 자부심
"국경 초월한 노래" 일본서 더 유명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切実な望みが一つ吾れにあり諍いのなき国と国なれ).’
20일 한ㆍ일 정상회담 직후 두 정상이 보도진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TV로 지켜보던 이승신(54ㆍ갤러리 더 소호 대표)씨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어머니(손호연)의 시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남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21일 화랑에서 만난 이씨는 “와카(和歌)를 통해 평생을 사랑과 평화, 특히 한ㆍ일 양국의 평화를 노래해 온 어머니의 노력이 이제서야 작은 결실을 맺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손씨의 시를 인용한 뒤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해 온 손 시인의 시를 최근에 접하게 됐다”며 “다툼 없는 나라가 되기 바라는 시심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국민의 희망이요 바람”이라고 설명했다.
와카(和歌)는 31자로 된 5ㆍ7조의 짧은 시로 일본의 국시(國詩)로 일컬어진다. 17자(5ㆍ7ㆍ5) 정형시 하이쿠(俳句)의 모태가 바로 와카다.
고이즈미 총리가 세 번이나 언급한 손호연(1927~2003)은 유일한 한국인 와카 시인이었다. 그는 일제 때 일본 사가미 여자대학에 유학하던 중 유명한 고(古)문학가였던 사사키 노부쓰나를 통해 와카에 입문했다. 유학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을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오래된 한옥에 살면서 시를 썼는데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60여 년 동안 2,000여 편의 와카를 지었고 일본의 유명 출판사 고단샤에서 시집을 6권이나 냈다. 와카의 최고 권위자 나카니시 스스무 교토예술대 총장으로부터 “일본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한국인의 감정을 담아낸 국경을 초월한 노래”라는 격찬을 받는 등 ‘명인(名人)’ 칭호를 얻었다. 98년에는 와카의 대가로 천황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엔 한ㆍ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이듬해엔 같은 공로로 일본 정부 표창을 받았다. 일본에는 아오모리현 로카쇼무라 등 네 곳에 그를 기리는 시비까지 세워져 있다.
손 시인은 형식은 와카를 빌렸지만 내용은 한복이나 장독대 등을 소재로 한국의 전통 문화와 두 나라가 다툼 없이 지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다. 맏딸인 이씨는 “어머니는‘한국 사람이 왜 일본 시를 짓느냐?’는 질타도 많이 받으셨어요. 하지만 와카의 뿌리가 우리의 향가라고 굳게 믿고 오히려 더 자부심을 갖고 진력하셨지요”라고 말했다.
다섯 권의 시집에 ‘무궁화 1~5’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 이윤모(전 변리사협회장) 변호사의 아내이자 1남 4녀의 어머니로서 해방ㆍ분단ㆍ전쟁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손씨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국경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인 희로애락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과거 앙금을 조금이나마 삭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씨는 어머니 이름을 딴 문학상 제정 등 각종 손호연추모사업(홈페이지 www.sonhoyun.com)을 준비 중이다. 3년 전 역자로 참여해 첫 한국어 번역본‘호연연가(好姸戀歌)-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샘터 발행)를 펴낸 데 이어 최근엔 시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을 끝냈다.
이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20여 년간 방송기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귀국 후 제일기획 고문 등을 지내고 현재는 필운동 옛 한옥 터에 지은 복합예술공간‘더 소호’의 대표이자 손호연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아사히 2005년 6월 21일
天聲人語
...중략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고이즈미 수상은 서울의 정상회담 직후 회견에서 한국의 여성 시인 손호연씨의 단가 시 한수를 인용했다. 손시인은 戰前에 동경에서 태어나 전후 다시 일본에 유학와 단가를 배웠다.
해방후 최초의 시집의 제목은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였다. 서문에 ‘悲願’이란 제목의 단가가 있다.
『동아시아 끝자락 나라에 살아온 나,
오로지 평화만을 기원하네.』
손시인의 단가를 인용한 것은 “절실한 하나의 소원”의 실현에 힘을 더하겠다는 그의 의지일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은 피해를 받은 측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래서 서로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싶다.
산께이 신문
2005년 6월 22일
▶이번 한일 정상 회담은 대체 무언가? 2시간 중 1시간 50분을 “역사인식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논의가 평행선을 긋다가 끝난 것은 어쩔 수 없다. 회담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공동기자발표에서 합의의 내용을 일부러 잘못 읽은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만찬회를 “비교적 간단하게 하겠다”고 함부로 말했다. ▶무슨 무례인가. 결국, 회담의 성과라고 한다면 “한국의 유일한 가인”인 손호연 시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일까. “절실한 소원이 나에겐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고이즈미 수상이 회담 후에 인용한 단가의 작자이다. ▶손 시인이 단가를 알게 된 것은 쇼와(昭和) 16년, 그녀가 동경의 제국여자대학교에 유학하던 중의 일이었다. 귀국 후에는 1남 4녀를 키우면서도 단가를 계속 지었다. 그녀가 지도를 받은 가인인 사사키 노부츠나로부터 “중도에 그만두지 마라, 일본 노래를 흉내내지 마라”라는 격려를 마음에 새겼다. ▶반일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손 여사에 대한 시선은 차가웠다. 그녀의 전기, ‘풍설의 가인’ (고단샤 출판)을 집필한 키다데 씨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일본어 교육은 불행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민족의 애감을 읊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 자신을 그렇게 분기시켰다.” ▶평성 10년 1월 궁중 가회시의의(궁중 낭송회)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특별 초대받은 손 시인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참례했다. 전후 출판한 5권의 가집 모두에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2년 전에 별세한 손 시인은 애국자였기에 이러한 노래를 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웃해 있고 마음에도 가까운 나라 되라고, 무궁화를 사랑하고 벚꽃을 사랑하네.” 반일정책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밖에 국민에게 애국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대통령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시심일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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