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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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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복영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7-11-01 10:12 조회87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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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대해선 좀더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다시 한번.
동족상잔의 625가 끝난지 반세기도 지났고
지리산이 그 전장의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625 전쟁 기간 동안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처절한 유격전이 벌어진 곳 중의 하나임은 분명할거야.
지금의 지리산은 국립공원으로 되어서 그 웅장한 능선들과 수려한 경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일급 명승지지만
몇 십년 전만해도 그곳이 처절한 생과 사의 혈투의 장소였다는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늙다리들뿐일테고 젊은 애들은 웬 헛소리냐 할지도 모르지.

50년 6월 25일 남침의 탱크소리로 지축을 흔들면서
김일성의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다시 힘을 얻은 국군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압록강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 잘하면 그 때 통일도 될 수 있었는데 그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그해 12월 중순 흥남철수작전부터 밀려 내려오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었자나.
51년 7월부터 정전회담이 개시됐었고 53년 스탈린이 디지구 나서
그해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돼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거고.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선이 북쪽으로 급격히 옮겨지자
인민군 부대에서 낙오됐던 전투원, 부상병들,
다시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올 날을 기다리며 숨어있던 민간인 기간요원들,
이들에 동조한 남쪽 민간인 등등이 북으로 도주 통로가 막히자
도망치기가 여의치 못하니까 숨어든 곳이 바로 소백, 지리 지구.
당시 이 소백 지리 지구에 모여든 빨치산은 가장 많을 때는 약 1만명도 넘었다고 하고,
그중에서 남부군 또는 남부군단 또는 이현상부대가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남한에서의 좌익게릴라의 효시는 1946년 당시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소위 대구 10월사건에서 비롯된다는데 여기에 제주도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등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잔당들이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줄기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처음엔 산만하고 비조직적이었던 유격투쟁이 군이나 경찰 조직원들이 합세가 되고
인원수가 많아지자 점차 조직적 투쟁으로 자리를 잡아가다가
625 발발후 현역군인들의 합세로 완전한 유격부대 체재가 됐고.

유격부대들은 소백 지리 지구 여기저기에 많았지만
그중에서두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가장 전설적인 빨치산부대로 유명해서
지금은 지리산 공비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지.
남부군은 남한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고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스러져갔는데
이들은 어차피 남쪽으로부터는 궤멸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로 자기들이 생명을 걸고 충성을 바치던 북한정권으로부터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철저히 버림받은 비운의 병단이었어.

남북의 전투가 정전회담이 진행되면서부터 휴전선 부근에서 소강상태를 이루게 되자
병력에 여유가 생긴 남한측은 전투병력의 일부를 소백지리 지구로 옮겨서
군경 합동으로 후방의 전투집단인 공비 토벌 작전으로 들어갔지.
그때부터 가열찬 공비소탕작전이 벌어지면서 차츰 공비부대들이 토벌되가고
최후까지 남아 결사항전하던 부대가 바로 이 지리산에서 이현상이 이끌던 남부군.

빨치산들은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그야말로 굶기를 밥먹듯 했지만
굶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겨울의 동장군이야.
지리산의 겨울은 일찍 시작해서 늦게 끝날 것은 당연.
게다가 눈이 하얗게 쌓이고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면 어디 숨을 데도 없이 다 들어나잖아.
단지 압도적인 자연과 대치하는 맨몸의 인간일뿐.
그들은 남쪽 군경들의 토벌이 시작되면 그들을 피해
지리산 그 험하고 높은 봉우리들을 짐승보다도 빠르게 넘나들어 도망치고 숨고,
몇 날 몇일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니까 걸으면서 잠자고 걸으면서 꿈꾸고 잠시 눈밭에서 산죽을 꺽어서 깔고 눈을 부치고
잠이 깨면 천둥소리 같은 눈보라의 울부짖음과 어둠과 허기와 뼈를 찌르는 추위 속에서 생존한거야.
이념이 뭔지 그 젊은 청춘들이 이름없이 스러져서 어느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백골로 변해갔지만 그들에게도 꿈과 희망과 사랑이 있었을거 아냐!
그렇게 처참하게 살다가 죽어서 지금 남이나 북의 역사에서 제대루 대접이나 받구 있냐말야!
북은 그들을 이용하고 버리고 지금은 망각까지 하고 있잖아!
그들의 원혼이 남아있다면 억울해서 도저히 저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애.

그들은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산밑으로 내려와 자수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토록 이념이 투철했을까?
답은 아니다라고 생각해.
당시에 토벌군이 지리산 일대를 비행기로 돌면서 삐라를 천만장도 넘게 뿌리면서 자수를 권하고
자수하면 무조건 살려준다고 했지만 이들이 별로 신용한 것 같진 않아.
오직 부대원과 대열에서 이탈하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구
그길 만이 생존이라구 생각한거구 또 서로간에 감시체재도 상당했고 .
남부군들은 그 삐라를 담배마는데 쓰거나 뒤지용, 기록용지 같은 것으루 사용했다는군.

인간의 생존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을 絶하는 빨치산의 생존 상황은
당연히 소설감이라 이런저런 작가들이 많이 썼지만
그중에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태백산맥이 있고
또 남부군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태(필명)라는 사람이 1988년에 펴낸 책이야.
태백산맥이 사실보다는 소설의 형태를 갖춘 책이라면 남부군은 소설이기보다 사실을 기록한 책.

남부군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지리산의 위용을 알게 된 나는 이 남부군을 몇 번이나 되읽었고
읽을 때마다 부록으로 붙어있는 지리산의 자세한 지도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읽어서
그때는 지리산 골골이 눈앞에 훤할 지경이었어.
그 책을 읽은 뒤부터 지리산이 가고싶어서 몸살을 내다가
어느 가을 날 남편 옆구리 쿡쿡 찔러서 내 장끼인 무데뽀루 산청으루 가서
애들 할아버지랑 증조부모 산소에 성묘하구 하루 잔 담날
중산리루 해서 천왕봉을 올라갔다 내려왔지.

사실은 내가 겔름배이 괴수거든!
젊어서야 고딩 때부터 수영부 소속이었고 철따라 각종 운동 빼트리지 않고 폼잡고 했는데
시집가서부턴 부엌떼기 노릇에 매진하느라고 운동은 카니와가 되다가
이젠 오직 숨쉬기 운동만 하고 산에도 일년에 대여섯번 가면 고작이었는데
갑자기 1,915m짜리 천왕봉을 하루에 오르려니 말 안되는건 당연.
머리가 백발인 할매두 날 앞질러 가드라구. ㅎㅎㅎ
하여간 지리산이 어케 생겼나 노무 궁금해서 당일치기로 천왕봉을 가보긴 했지만
그건 수박 겉핥기라 지리산에 대한 꿈을 죽 갖구 있었는데
이번에 고등학교 등산반 팀이 가자고 하면서 용기를 불어넣어줘서 감행을 한거지.
모든게 성대장 덕분이라 정말 고마웠어!
성대장께 꾸뻑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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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영아,  정말 대단하구나.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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