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오스트리아 항가리 체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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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작성일2003-09-08 21:25 조회1,783회 댓글13건본문
8일 동안 다녀온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여행은 너무 짧아 꿈만 같다. 80년초 유레일 패스로 유럽여행 때 비엔나 행 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혹시 공산권인 부다페스트로 갈까봐 마음 조리던 기억이 되 살아났다. 그때는 상상도 못한 동구라파를 가니 감회가 남달랐다.
독일 여행을 통해 독일인의 절전의식을 보았다. 밤에 프랑크푸르트 상공에 도착해 내려다 보니 가로등에 드문드문 불이 들어오고 도시 전체가 어두웠다. 요즈음 대낮처럼 환한 서울의 거리와 대조적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뮨헨 까지 아우토반을 달리며 보이는 것은 검은 숲과 잔디 밭 뿐 독일은 나무만 팔아도 30년은 살 수 있다고 한다. 잿빛 하늘 속에서 가끔 흰빛을 발하는 해는 보름달을 연상케 했다. 독일 사람들은 <노력한 만큼 수확을 걷는다>를 생활신조로 산다는데 실제로 힘든 일 하는 자가 수입이 많아 의사 집 앞에는 폭스바겐, 농부 집 앞에는 벤츠가 있다고 한다. 생활이 단조롭고 햇빛이 적은 독일인에게 휴가는 절대적이며 휴가를 어디로 가는가가 삶의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라고 한다. <좋은 문화 속에 살면 좋은 사람된다>는 독일인들의 사고가 부럽기만 하다.
바그너의 <로헨그린>서곡을 들으며 도착한 뮨헨은 베르린, 함부르크와 함께 독일의 3대 도시로 바이에른의 1200년 간 수도이며 맥주의 고장으로 유명하고 히틀러의 정치적 중심지이었다. 뮨헨에서 짤즈부르그로 가면서 평지만 보이다가 가까워지니 알프스 산이 나오면서 눈 덮인 높은 산들이 나왔다. 짤즈부르그의 짤즈는 "소금"이란 뜻으로 옛날에 소금 광산이 있어 소금을 팔아 주교가 이곳을 부흥시키고 통치를 했다. 그가 1660년 애인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미라벨 정원과 성을 돌아보았다. 모찰트의 생가가 있는데 모찰트는 주교와 싸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짤트 명성으로 먹고사는 곳이되었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 싸고있는 높은 암벽을 1770년 짤즈 시민을 수용하고 생활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로 만들었다. 도시전체가 한 덩어리의 건축예술작품을 보는 듯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장 유명한 곳은 모찰트 생가가 있는 예쁜 간판들로 장식된 <간판 거리>로 그 거리의 맨 끝에 높은 암벽에는 카타콤베와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성당이 있어 중세기로 돌아간 분위기다. 그 옆에는 카라얀의 무덤이 있는 <훼스트 스펜 하우스>가있고 뒤에 산을 깎아 만든 250명을 수용하는 소극장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망명 전에<에델바이스> 합창을 부른 곳이다.
비엔나를 향해 시내를 벗어나면서 눈 덮인 높은 산, 그림 같은 집, 푸른 초원, 숲이 한데 어울려 연출하는 겨울경치에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이 매료되었다. 잠시 후 UNESCO가 지정한 4개 호수경관지역인 잘츠카머구트 중에서 가장 큰 모찰트 어머니가 살았던 볼프강 호수에 도착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잠시 산책하며 그곳의 경관에 흠뻑젖어보았다. 바다같이 넓고 푸른 호수주변은 눈 덮인 산과 구름이 어울려 환상적인 겨울 분위기를 자아냈고 물 속은 유리처럼 맑고 투명해 마시고 싶을 정도였다. 대 평원이 붉게 물들며 장관을 이룰 무렵 비엔나에 도착했다.
<하루라도 음악을 안 들으면 귀에 가시가 돋는다>는 비엔나 사람들은 보수적이며 고전 음악만 매일 연주한다. 밤에 시청근처의 연주 장에서 영화 <아마데우스>복장을 입은 현악 4중주, 무용, 성악 연주를 감상 하고 음악의 도시에 온 분위기를 맛보았다. 비엔나는 유네스코 지정도시로 건축을 그대로 유지 보존해야 하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20년 만에 다시 본 비엔나는 변함이 없고 <비엔나의 혼>인 스테판 성당 주변은 여전히 관광객으로 복잡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갑자기 음대여학생 가이드는 나와 팔 장을 끼고 걸었는데 자격증 없이 가이드하면 걸린다고 했다.
비엔나에 한국학생이 천명이상 있는데 대학생은 국립대 2백 명과 시립 대 3백 명만 학교에 다니고, 주민은 간호사 출신들 3백 명이 있다. 대학입학은 2번 떨어지면 못 들어가는데 히틀러도 미술대학 2번 낙방하고 그림 그린것 유태인 친구들이 팔아주어 생활하고 그후 서부 역 청소, 합창단 하다가 쫒겨 나서 거리의 부량아로 추방당해 독일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고한다. 비엔나는 파리처럼 개들의 천국이기도한데 주인이 하루 4시간씩 산책시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서 압수한 개는 TV나 신문에 광고해 새 주인을 찾아준다. 따라서 개한테 물리면 보상금도 많다. 강대국이었던 그들은 항상 50년 전 생각 만하고 할머니들은 옛날처럼 게르만 민족의 우월 의식이 남아있어 은근히 외국인을 긁어내리고 날씨처럼 성격도 변덕스럽다고 한다.
비엔나를 떠나 부다페스트를 향하면서 수채화 같은 전원 풍경은 살아지고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만이 눈에 들어왔다. 브람스와 리스트가 활동 한 부다페스트를 밤에 도착해 아름다운 다뉴브강의 선상에서 슈트라우스 음악을 듣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바라보며 샴페인을 마시니 꿈만 같았다. 다뉴브강에서 150년 된 가장 오래된 란찌우드 다리는 수천 개의 전구로 밝고 환하게 다뉴브강을 장식했다. 길이가 417킬로나 되는 다뉴브강 중에서 부다페스트의 강폭이 가장 넓고 수심이 30미터 된다고 하는데 선상에서 가까이 보니 물살이 상당히 빨랐다.
항가리는 마자르 족이 세운 <유럽 안의 유일한 동양족의 나라>라고 한다. 1200년 동안 유럽인과 동화되었으나 우랄알타이 언어와 마늘, 고추 먹는 문화가 우리와 흡사해서 친근감이 갔다. <여성천국>으로 세대주, 호주가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힘이 대단하다. 헝가리에는 12명의 성인이 있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순교한 성인은 겔러러트 이다. 루터 교의 본당과 칼빈 교회가 나란히 서있고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한 사죄로 지어준 유럽최대의 유태교회가 있다.
도시 한가운데를 다뉴브강이 흐르고 언덕 위에 부다는 부다 성을 비롯해 귀족들이 사는 지역이고 페스트는 평지로 상인과 농부가 주로 거주한다. 부다페스트는 유네스코 지정도시이며 주로 150-200년 된 건물이고 새로 짓지 못하고 수리만 가능하다. 맨 처음에 간 곳은 헝가리 건국 천년동안에 역사적인 인물의 기념비가 있는 1896년에 만든 페스트 지역의 영웅광장 이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교황청이 선정한 성인으로 오른손에 십자가를 든 <건국의 왕> 이스트 반 대왕의 동상이 있는데 국빈이오면 이스트반동상의 손에 키스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다리를 건너 13세기부터 수도이었던 부다 지역으로 이동해 왕궁으로 올라가면서 <어부의 요새>라 부르는 계단을 통과했다. 전에는 어부들이 이곳에서 적이 쳐들 어 오는 것을 감시한곳이다. 부다 성은 13-15세기에 지었는데 외세의 침략으로 왕이 제대로 살지 못한 <비운의 성>이다. 건물만 있고 사람이 산 흔적이 별로 없다. 13세기에 몽고 군이 침공해 헝가리공주를 폴랜드 와 정략결혼을 시켜 시집가면서 공주가 결혼반지를 던졌는데 그곳에서 지하 300킬로나 되는 소금광산이 발견되고 부자가되어 부다페스트 도시가 탄생되었다. 언덕위에 부다 성 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재이며 영화 에비타, 닥터 지바고, 글루미 선데이 등을 촬영한곳으로 유명하다. 길가에 총탄 투성 이인 독일군 요새와 베토벤이 최초로 연주한 기념관 도 있고 현재 넓은 로마인 유적지가 발굴중이었다.
항가리는 15세기 때 터키의 지배를 받고 이슬람교가 들어
왔으나 카톨릭이 오늘날 정치, 종교의 중심이며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14명이나 배출했다. 부다페스트는 야경과 온천, 똑가이 라는 백포도주, 도자기, 자수품이 유명하다.
점심식사 후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끝없는 평원을 3시간 달려 슬로바키아 국경의 공동구역에 도착하고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차속에서 감상하며 2시간 달려 체코 입국수속을 하고 밤10시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택시로 프라하성의 야경을 보러 갔다. 몰다우 강 언덕 위에 성과 왕궁, 1357년 카롤4세 명령으로 세운 웅장한 카를로스 다리 위의 30여 성인상들은 오렌지 가로등불 빛에 환상적이었다. 친구와 둘이서 다리를 건너 좁은 중세의 돌길을 따라 왕궁으로 걸어올라 갔다. 왕궁 쪽은 조용해서 긴장을 하고 걷는데 어둠 속에서 개를 부르는 인기척이 들리니 너무 반가웠다. 희미한 불빛에 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안심하고 닥아가서 왕궁 가는 길을 물었다. 왕궁의 조명이 꺼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노인의 친절한 안내로 개와 함께 우리는 왕궁을 한바퀴 산책하고 돌아왔다. 노인은 함부르크에서 살았는데 이 곳이 좋아서 살고 있는 사진사로 유모어 감각이 있어 재미있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프라하 사람들은 대부분이 주말 농장에 가고 시내는 한산했다. 처음에 간 곳은 1968년 민주화 혁명을 한 바츨라프 광장이고 근처에 구 시가 광장에 있는 구 시청 사에서 15세기에 만든 천문시계와 매시 정각 12사도 인형들이 나오는 쇼를 구경했다. 그 광장은 건축물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고딕, 로코코,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등 한 눈에 볼 수 있어 건축가들의 관심지역이다. 그 중에 구 시청과 틴 교회 건물이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건물이다.
다음에는 왕궁으로 가기 위해 1686년부터 50년 간 30여 성인조각을 한 카를로스 다리 위를 걸어갔다.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답게 중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내 가운데를 몰다우 강이 흐르는데 성 쪽에는 귀족이 살고 구 시가는 상업지구다. 특히 프라하 성 밑은 12세기부터 시작한곳으로 UNESCO 지정지역이며 빨간 지붕으로 통일되었고 구 시가, 신시가, 유대인 지역으로 나뉘었다.
프라하성은 대통령이 사용하고있으며 대통령기가 있으면 대통령이 있다는 표시다. 성 건너 왼쪽 언덕 위에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넓은 포도밭이 있고 에펠탑의 4분의 1만한 철탑이
있는데 체코 인들이 가장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성 앞 광장에는 1918년 오스트리아를 없애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생시킨 사람의 동상이 있다. 특이한 것은 성문 입구에 <헤라클레스>상이 버티고 있는데 이는 강압적으로 세금 걷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만든 것이다.
성 뒤쪽에 보헤미아 최초의 왕인 바츨라프 장군의 무덤이 있는 비투스 성당이 있는데 11세기에 시작해서 1620년에 완성한 고색이 창연한 성당인데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들어갔다. 성당 오른쪽 건너에 옛날 왕이 살던 왕궁이 있다. 성당뒤쪽은 <황금소로>라고 부르는 곳인데 옛날에 장인들이 금은세공을 하면서 금은가루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감금시킨 한 평 정도의 작은 공방들이 길게 늘어선 좁은 길이다. 체코의 공예품을 팔고 있으며 일년에 관광객이 1억이나 온다고 하는데 발 디딜 틈 없이 몸을 부딪히며 걸어야 했다. 집시 도둑이많으며 친구도 하마트면 지갑을 잃어버릴 뻔 했다.그곳의 22번지는 카프카가 작품<변신>을 쓴 곳으로 유명하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자고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해서 구 시가지의 시청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 1356년 구 시청 사 뒤 카이젤 돔에서 독일황제 선출하고 1562년이래 10명의 독일 황제가 즉위한 역사적인 지역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심장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 로 인해 교통의 요지이며 높은 건물은 은행으로 독일의<맨하탄>이라고 한다. 독일과 유럽 최대의 금융도시로 부상하고 1240년 프리드리히1세가 이곳에서 '가을 박람회' 허용한 것이 박람회의 시작이며 세계적인 박람회 도시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짧은 시간에 동부유럽을 한바퀴 돈 셈인데 오전에는 도시 관광 오후에는 버스로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百聞不如一見이란 말처럼 역사적인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본것이 무엇보다 그 나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머리속에 남아있어 가깝게 느껴진다.<여행은 돌아가기 위해 나온다>는 가이드의 말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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