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조화를 이룬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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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작성일2003-11-14 21:56 조회1,187회 댓글10건본문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년 내내 비가 많이 온다. 그래서인지 시내에는 조각과 분수광장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유럽에서 물이 가장 좋다고 하니 물과 햇빛이 좋은 스페인을 유럽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1561년 똘래도에서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긴 시내 중심에 푸에르타 델솔(Pureta Del Sol)은 "태양의 문"이란 뜻으로 16세기에 화려했던 스페인의 영광을 상징하는 성문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푸에르타 델솔을 중심으로 10개의 도로가 방사선모양으로 뻗어있고 주변은 이 도시의 중심으로 프라도 미술관, 왕궁, 스페인 광장, 그랑비아 등 명소들을 걸어 갈 수가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마드리드는 9C경 아라비아인들의 정착지였고 16C이후 스페인의 수도로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리일행은 건물보존 구역인 스페인 광장에서 스페인의 대표적 문호 세르반테스와 그의 작품 속의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을 구경하며 산책을 한 다음 보행자들의 거리이며 쇼핑가인 그랑비아 거리를 지나 레알 왕궁으로 갔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며 세계를 누비던 시절의 왕궁은 넓은 광장과 카를로스3세의 위풍당당한 석상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궁전의 2800여 개 방중에 45개방만 볼 수 있었다. 방마다 전 세계에서 가져 온 다양한 예술품들로 넘쳤다. 어떤 방은 시계만, 어떤 방은 도자기만 하는 식으로 전시되었다. 바로크시대에서 빅토리아 조에 이르는 장식품들과 회화, 조각품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나는 소장품들을 보고 나서야 스페인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국가였음을 실감했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세계적인 프로 축구팀은 왕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독립문을 지나 시원한 분수가 흘러 넘치는 콜럼부스 광장으로 가니 항해의 왕 콜럼부스의 동상이 바다를 향해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인상적이었다. 콜럼부스는 원래 이태리 북부 제노아 사람인데 포르투갈에 항해지원을 요청했으나 바스 코다 가마가 있어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시내에 공원은 여의도 만한 크기라고 하는데 마로니에 꽃이 만발하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으로 가니 이미 관광 버스들로 거리는 꽉 차고 관광객들의 줄은 겹겹이 둘러싸여 한참을 기다려서야 입장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프라도 미술관은 12-18세기에 세계유명화가들과 스페인화가들의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 중의 하나다.
역대 스페인 왕실이 소장했던 방대한 수집 품의 절반이 3층으로 된 넓은 공간에 전시되었다. 3천 여 점의 전시품 중에서 스페인의 3대 거장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꼬의 작품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프라도"라는 말은 "목장" 이라는 뜻이며 엘 그레꼬, 벨라스케스, 고야, 루벤스, 티티앙, 보티첼리, 피카소 등의 명작을 소유하고 있다. 전시품이 많아서 우리 일행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먼저 도표를 보며 전시실을 찾아다녔다.
궁중화가 고야의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나체의 마야" "옷 입은 마야", 그리고 전쟁의 잔혹상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화제가 되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 외에 “십자가의 예수” 그림은 진한 감동을 주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꼬의 유명한 작품 "가슴에 손을 얹은 귀족“과“천국의 열쇠를 쥐고있는 베드로의 초상" 인데 베드로의 참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13년 전 내가 암으로 고생할 때 친구가 엽서그림으로 액자를 만들어 선물을 해준 그림이기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와 보티첼리의 작품을 보면서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 빛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에는 화려한 원색이 많다.
다음에는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세고비야로 향했다. 헤밍웨이 작품 잉그리드 버그만과 록 허드슨 주연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의 로케장소로 알려진 자그마한 고도다.
로마인이 2천년 전에 돌로 지었다는 어마어마한 수로용 다리를 보고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개가 일 미터도 넘어 보이는 돌들을 쌓아만든 높이가 20미터에 폭이70미터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수로다. 지금도 물을 보내는 다리로 사용중이라는데 더욱 놀랬다. 한적하고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곳인데 미국에서온 관광객들을 만났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원전 로마인들의 돌 쌓는 건축 기술과 방대한 스케일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 이런 역사를 하기 위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희생 되었을가 생각하며 포장하지 않은 붉은 황토 길에서 뽀얗게 일어나는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로마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밤에는 플라맹고를 관람했다. 11시부터 시작해서 4시간 공연인데 두 시간만 구경했다. 집시의 삶의 애환과 사랑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플라맹고의 춤과 기타 반주는 이색적이나 애조를 띈 독특한 창법은 우리나라의 창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단조로웠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창은 노래하는 사람은 서고, 반주하는 사람은 앉아서 가끔 흥을 돋구어 준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은 무희, 가수, 기타반주가 함께 혼연 일치가 되어 남녀의 사랑을 진하게 표현한다. 투우사의 기질에서도 그 정열을 엿볼 수 있다.
20년 만에 다시 온 마드리드는 전보다 도시가 깨끗해지고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광장, 공원 그리고 옛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멋진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불량배들이 많아 단체행동 외에는 호텔 밖을 나가지 못했다. 매년 2만 여명이 모로코 등지에서 올리브, 포도 따는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돌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도둑으로 변해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일본인을 노렸는데 요즘은 한국인이 많이 당한다고 했다. 우리와 한 호텔에 묵은 한국관광객 중에서 당한 것을 목격하고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20년 전 보다 관광객의 수는 말할 수 없이 늘었는데 치안이 따라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었다.
이종희 (여행 칼럼니스트, 프랑스 파리에서 장애인 치료분야 유학
푸에르타 델솔을 중심으로 10개의 도로가 방사선모양으로 뻗어있고 주변은 이 도시의 중심으로 프라도 미술관, 왕궁, 스페인 광장, 그랑비아 등 명소들을 걸어 갈 수가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마드리드는 9C경 아라비아인들의 정착지였고 16C이후 스페인의 수도로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리일행은 건물보존 구역인 스페인 광장에서 스페인의 대표적 문호 세르반테스와 그의 작품 속의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을 구경하며 산책을 한 다음 보행자들의 거리이며 쇼핑가인 그랑비아 거리를 지나 레알 왕궁으로 갔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며 세계를 누비던 시절의 왕궁은 넓은 광장과 카를로스3세의 위풍당당한 석상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궁전의 2800여 개 방중에 45개방만 볼 수 있었다. 방마다 전 세계에서 가져 온 다양한 예술품들로 넘쳤다. 어떤 방은 시계만, 어떤 방은 도자기만 하는 식으로 전시되었다. 바로크시대에서 빅토리아 조에 이르는 장식품들과 회화, 조각품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나는 소장품들을 보고 나서야 스페인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국가였음을 실감했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세계적인 프로 축구팀은 왕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독립문을 지나 시원한 분수가 흘러 넘치는 콜럼부스 광장으로 가니 항해의 왕 콜럼부스의 동상이 바다를 향해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인상적이었다. 콜럼부스는 원래 이태리 북부 제노아 사람인데 포르투갈에 항해지원을 요청했으나 바스 코다 가마가 있어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시내에 공원은 여의도 만한 크기라고 하는데 마로니에 꽃이 만발하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으로 가니 이미 관광 버스들로 거리는 꽉 차고 관광객들의 줄은 겹겹이 둘러싸여 한참을 기다려서야 입장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프라도 미술관은 12-18세기에 세계유명화가들과 스페인화가들의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 중의 하나다.
역대 스페인 왕실이 소장했던 방대한 수집 품의 절반이 3층으로 된 넓은 공간에 전시되었다. 3천 여 점의 전시품 중에서 스페인의 3대 거장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꼬의 작품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프라도"라는 말은 "목장" 이라는 뜻이며 엘 그레꼬, 벨라스케스, 고야, 루벤스, 티티앙, 보티첼리, 피카소 등의 명작을 소유하고 있다. 전시품이 많아서 우리 일행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먼저 도표를 보며 전시실을 찾아다녔다.
궁중화가 고야의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나체의 마야" "옷 입은 마야", 그리고 전쟁의 잔혹상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화제가 되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 외에 “십자가의 예수” 그림은 진한 감동을 주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꼬의 유명한 작품 "가슴에 손을 얹은 귀족“과“천국의 열쇠를 쥐고있는 베드로의 초상" 인데 베드로의 참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13년 전 내가 암으로 고생할 때 친구가 엽서그림으로 액자를 만들어 선물을 해준 그림이기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와 보티첼리의 작품을 보면서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 빛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에는 화려한 원색이 많다.
다음에는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세고비야로 향했다. 헤밍웨이 작품 잉그리드 버그만과 록 허드슨 주연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의 로케장소로 알려진 자그마한 고도다.
로마인이 2천년 전에 돌로 지었다는 어마어마한 수로용 다리를 보고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개가 일 미터도 넘어 보이는 돌들을 쌓아만든 높이가 20미터에 폭이70미터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수로다. 지금도 물을 보내는 다리로 사용중이라는데 더욱 놀랬다. 한적하고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곳인데 미국에서온 관광객들을 만났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원전 로마인들의 돌 쌓는 건축 기술과 방대한 스케일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 이런 역사를 하기 위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희생 되었을가 생각하며 포장하지 않은 붉은 황토 길에서 뽀얗게 일어나는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로마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밤에는 플라맹고를 관람했다. 11시부터 시작해서 4시간 공연인데 두 시간만 구경했다. 집시의 삶의 애환과 사랑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플라맹고의 춤과 기타 반주는 이색적이나 애조를 띈 독특한 창법은 우리나라의 창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단조로웠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창은 노래하는 사람은 서고, 반주하는 사람은 앉아서 가끔 흥을 돋구어 준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은 무희, 가수, 기타반주가 함께 혼연 일치가 되어 남녀의 사랑을 진하게 표현한다. 투우사의 기질에서도 그 정열을 엿볼 수 있다.
20년 만에 다시 온 마드리드는 전보다 도시가 깨끗해지고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광장, 공원 그리고 옛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멋진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불량배들이 많아 단체행동 외에는 호텔 밖을 나가지 못했다. 매년 2만 여명이 모로코 등지에서 올리브, 포도 따는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돌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도둑으로 변해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일본인을 노렸는데 요즘은 한국인이 많이 당한다고 했다. 우리와 한 호텔에 묵은 한국관광객 중에서 당한 것을 목격하고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20년 전 보다 관광객의 수는 말할 수 없이 늘었는데 치안이 따라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었다.
이종희 (여행 칼럼니스트, 프랑스 파리에서 장애인 치료분야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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