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박완서 산문집)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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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작성일2003-10-29 22:24 조회1,478회 댓글13건본문
(화성도서관 운영위원 모임에서 독후감 공모에 대한 얘기가 나와 출품했다 상을 받게되었읍니다)
칠순을 넘은 나이에도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과 자연과 벗하며 사는 노년의 삶 속에서 박완서 선생님 특유의 한 폭의 수채를 보는 듯한 섬세한 묘사와 성찰을 발견 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은퇴 후의 삶을 시골에서 살고 있기에 더 더욱 공감이 가는 작품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한 권의 산문집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노년의 감정들을 아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 '노년'을 다룬 부분을 주로 다루기로 하겠다.
<1부 노년의 자유>에서는 가족이라고 부르는 관계끼리는 안으로 보듬어 안는 힘이 강한 만큼 우리 아닌 남을 밀어내고 해치려는 힘 또한 얼마나 막강한지 새삼 알 것 같다는 자신의 가족관을 피력했다. <두부>라는 수필을 통해 퇴임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기죽은 모습을 보며 그는 동정심이 라기 보다는 인간성을 공유했다는 친화감일 수 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출옥하던 날 누구나 먹는 <두부>를 거부하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에서 대통령보다는 오야붕을 연상했다. 가족과 이웃이 환영하기보다는 그를 눈물로 반기며 두부를 먹일 수 없었는지 그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옥살이나 재판 받는 것이 아닌 한 모의 두부를 향해 고개 숙이고 입술주변에 허연 두부 파편을 붙인, 적나나하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식문화와 식문화를 보는 장벽을 말하면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독일 영화를 통해 아랍인이 즐겨먹는 '쿠스쿠스'는 약소민족의 설음을 말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나도 그 영화를 인상깊게 보았다. 바에서 콜라를 마시는 아주 평범한 늙은 여자를 주인여자가 아랍계 젊은 근육질의 단골 손님에게 춤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동거를 하고 급기야는 결혼까지 하게된다. 아들과 엄마 같이 보이지만 아랍청년은 그녀에게서 안식처를 얻었고, 그녀는 자식들과 이웃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았다.
인종과 연령차라는 최악의 장벽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건너뛰기 어려운 장벽은 식문화라는 영화의 포인트가 작가는 더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쿠스쿠스(couscous)가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아들한테 하듯이 헌신적이던 여자가 단호하게 거절한다. 재차 청해도 여자는 쿠스쿠스가 싫다고 강한 혐오감을 나타낸다. 그녀가 그렇게 당당하게 단번에 남자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경멸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 문화의 우월감의 무의식적인 표현이 아닌가 저자는 생각한다.
내가 파리 유학 가서 소르본느 대학 근처의 식당 가에서 최초로 외국 음식을 먹어 본 것도, 니스에서 초대 받아간 프랑스 교수 가정에 가서도 그 집에 알제리 출신 가정부가 만든 쿠스쿠스 요리이었다. 지난해에 모로코 여행 때도 우리일행은 알함브라 궁전의 내부장식보다 더 오래되었고 보존이 잘되었다는 식당에서 호박, 당근, 양고기, 좁쌀을 쪄서 만든 모로코의 대표적인 쿠스쿠스 요리를 들으며 중세의 이슬람 왕족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라고 파리에서 들었고 나 자신도 잘 먹는 편인데 단지 아랍인의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은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과 성욕이라고 하는데 결국 식욕이 성욕보다 더 절실함을 보여 주었다. 한국인이 미국 유학 후 미국여인과 결혼한 경우 중년이후 이혼한 경우를 여럿 보았는데 이유중의 하나는 젊어서는 주로 한국식당에 가서 혼자 한식을 먹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활이 불편해서 해여 졌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먹고 성장한 식문화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되면 옛 것을 그리워하는 회귀적인 성향이 강한데 작가 역시 자신도 모르게 툭하면 옛날 타령한다고 했다. 노망이란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돌이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착란, 변하게 되어있는 것을 안 변하는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고통스러운 망상, 죽음이 보이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는 퇴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특히 시골출신들이 심신이 쇠잔해 갈 무렵 귀향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어릴 적에 입력된 땅의 끈질긴 소생력에 빌붙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환상 때문이 아닐까. 그런 뜻으로 시골뜨기들보다 고향 같은 것 없다고 공헌할 수 있는 도시 출신이 훨씬 담백하고, 품위 있게 늙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서울에서만 살아서 시골을 전혀 모르는 편인데 은퇴 후 시골생활을 하고싶어서 바다가 가깝고 주변이 숲으로 둘러 쌓인 남양으로 왔는데 눈만 뜨면 탁 트인 푸른 하늘과 푸른 소나무 숲, 시원한 공기에 매료되어 수십 년 간 살았던 서울에 가면 빨리 돌아오고 싶어진다.
이제 노년의 작가는 인생의 허무와 화해하고 싶고,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잊어버린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인생의 황혼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는가 지상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하도록 욕심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다고 이 작품을 읽으며 더욱 깊이 느꼈다.
아차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저자가 날마다 대하는 산과 사람, 꽃, 새, 나비 등을 소재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깨달음에 관한 글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에서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이 없음 때문이다. 인간사의 덧없음과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노년을 아름다운 노을에 비유한 아름다운 글이다.
저자의 고향인 개성은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한 고장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노력해서 번 돈은 돈 자체에도 격이 있어 함부로 쓰거나 너무 안 쓰면 돈이 스스로 등을 돌리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게 개성 사람들이다. 개성에서 일본 상인들이 발을 못 붙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건 상권을 지켜낸 일이 될 뿐 아니라 주변 농촌을 피페 하지 않도록 지켜준 마지막 보루가 되 지 않았나 싶다. 1전을 10등분하기 위해 성냥을 한 통 사서 나누는 지독한 개성여자들도 일본상인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손해를 보면서 까지 저항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상이 팽대 해서 과거에 근검 절약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즈음처럼 경제사정이 안 좋을 때에 우리젊은이 들이 허리를 졸라매고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앞날을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 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오늘날 일본이 장기 불황의 늪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그들의 몸에 밴 절약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에서 저자는 노년이 되니까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도 그만이다. 마음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 라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해산의 고통처럼 진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이제는 써야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를 만끽하시며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칠순을 넘은 나이에도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과 자연과 벗하며 사는 노년의 삶 속에서 박완서 선생님 특유의 한 폭의 수채를 보는 듯한 섬세한 묘사와 성찰을 발견 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은퇴 후의 삶을 시골에서 살고 있기에 더 더욱 공감이 가는 작품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한 권의 산문집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노년의 감정들을 아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 '노년'을 다룬 부분을 주로 다루기로 하겠다.
<1부 노년의 자유>에서는 가족이라고 부르는 관계끼리는 안으로 보듬어 안는 힘이 강한 만큼 우리 아닌 남을 밀어내고 해치려는 힘 또한 얼마나 막강한지 새삼 알 것 같다는 자신의 가족관을 피력했다. <두부>라는 수필을 통해 퇴임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기죽은 모습을 보며 그는 동정심이 라기 보다는 인간성을 공유했다는 친화감일 수 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출옥하던 날 누구나 먹는 <두부>를 거부하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에서 대통령보다는 오야붕을 연상했다. 가족과 이웃이 환영하기보다는 그를 눈물로 반기며 두부를 먹일 수 없었는지 그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옥살이나 재판 받는 것이 아닌 한 모의 두부를 향해 고개 숙이고 입술주변에 허연 두부 파편을 붙인, 적나나하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식문화와 식문화를 보는 장벽을 말하면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독일 영화를 통해 아랍인이 즐겨먹는 '쿠스쿠스'는 약소민족의 설음을 말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나도 그 영화를 인상깊게 보았다. 바에서 콜라를 마시는 아주 평범한 늙은 여자를 주인여자가 아랍계 젊은 근육질의 단골 손님에게 춤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동거를 하고 급기야는 결혼까지 하게된다. 아들과 엄마 같이 보이지만 아랍청년은 그녀에게서 안식처를 얻었고, 그녀는 자식들과 이웃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았다.
인종과 연령차라는 최악의 장벽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건너뛰기 어려운 장벽은 식문화라는 영화의 포인트가 작가는 더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쿠스쿠스(couscous)가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아들한테 하듯이 헌신적이던 여자가 단호하게 거절한다. 재차 청해도 여자는 쿠스쿠스가 싫다고 강한 혐오감을 나타낸다. 그녀가 그렇게 당당하게 단번에 남자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경멸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 문화의 우월감의 무의식적인 표현이 아닌가 저자는 생각한다.
내가 파리 유학 가서 소르본느 대학 근처의 식당 가에서 최초로 외국 음식을 먹어 본 것도, 니스에서 초대 받아간 프랑스 교수 가정에 가서도 그 집에 알제리 출신 가정부가 만든 쿠스쿠스 요리이었다. 지난해에 모로코 여행 때도 우리일행은 알함브라 궁전의 내부장식보다 더 오래되었고 보존이 잘되었다는 식당에서 호박, 당근, 양고기, 좁쌀을 쪄서 만든 모로코의 대표적인 쿠스쿠스 요리를 들으며 중세의 이슬람 왕족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라고 파리에서 들었고 나 자신도 잘 먹는 편인데 단지 아랍인의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은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과 성욕이라고 하는데 결국 식욕이 성욕보다 더 절실함을 보여 주었다. 한국인이 미국 유학 후 미국여인과 결혼한 경우 중년이후 이혼한 경우를 여럿 보았는데 이유중의 하나는 젊어서는 주로 한국식당에 가서 혼자 한식을 먹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활이 불편해서 해여 졌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먹고 성장한 식문화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되면 옛 것을 그리워하는 회귀적인 성향이 강한데 작가 역시 자신도 모르게 툭하면 옛날 타령한다고 했다. 노망이란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을 돌이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착란, 변하게 되어있는 것을 안 변하는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고통스러운 망상, 죽음이 보이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는 퇴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특히 시골출신들이 심신이 쇠잔해 갈 무렵 귀향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어릴 적에 입력된 땅의 끈질긴 소생력에 빌붙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환상 때문이 아닐까. 그런 뜻으로 시골뜨기들보다 고향 같은 것 없다고 공헌할 수 있는 도시 출신이 훨씬 담백하고, 품위 있게 늙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서울에서만 살아서 시골을 전혀 모르는 편인데 은퇴 후 시골생활을 하고싶어서 바다가 가깝고 주변이 숲으로 둘러 쌓인 남양으로 왔는데 눈만 뜨면 탁 트인 푸른 하늘과 푸른 소나무 숲, 시원한 공기에 매료되어 수십 년 간 살았던 서울에 가면 빨리 돌아오고 싶어진다.
이제 노년의 작가는 인생의 허무와 화해하고 싶고,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잊어버린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인생의 황혼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는가 지상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하도록 욕심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다고 이 작품을 읽으며 더욱 깊이 느꼈다.
아차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저자가 날마다 대하는 산과 사람, 꽃, 새, 나비 등을 소재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깨달음에 관한 글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에서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이 없음 때문이다. 인간사의 덧없음과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노년을 아름다운 노을에 비유한 아름다운 글이다.
저자의 고향인 개성은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한 고장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노력해서 번 돈은 돈 자체에도 격이 있어 함부로 쓰거나 너무 안 쓰면 돈이 스스로 등을 돌리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게 개성 사람들이다. 개성에서 일본 상인들이 발을 못 붙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건 상권을 지켜낸 일이 될 뿐 아니라 주변 농촌을 피페 하지 않도록 지켜준 마지막 보루가 되 지 않았나 싶다. 1전을 10등분하기 위해 성냥을 한 통 사서 나누는 지독한 개성여자들도 일본상인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손해를 보면서 까지 저항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상이 팽대 해서 과거에 근검 절약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즈음처럼 경제사정이 안 좋을 때에 우리젊은이 들이 허리를 졸라매고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앞날을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 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오늘날 일본이 장기 불황의 늪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그들의 몸에 밴 절약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에서 저자는 노년이 되니까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도 그만이다. 마음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 라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해산의 고통처럼 진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이제는 써야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를 만끽하시며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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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님의 댓글
기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우리의 보배...종희야!! 축하하며 사랑의 마음도 전한다